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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일과 UI

2009. 7. 13. 14:56 | Posted by 이 재용

2004/4/10

진화론자인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누군가 이 세상을 창조한 설계자가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재미난 일이다.  

간혹 회사 직원들과 각종 먹거리의 UI를 토론해 보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게’ 같은 경우는 너무 맛있는데 왜 그렇게 먹기 힘들게 만들어졌을까? 한 번에 먹기 적당한 크기로 포장되어 있고, 그 안에 두 가지 다른 맛이 들어있는데다가 영양소도 풍부하다니 ‘달걀’ 같은 것이 가장 좋은 것 아닐까? 더군다나 운반/보관을 위하여 세로 방향은 강하게 만들어 졌고, 요리를 한 손으로 할 정도로 간편하게 하기 위하여 가로 방향은 약하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반적인 먹거리는 설계자가 처음 설계할 때 본연의 목적이 ‘먹히는 데’ 있지 않기 때문에 토론이 진지해 지기는 힘들다. 그런데 유독 과일은 일단 동물에게 ‘먹힘’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발휘하는 것이므로 더욱 치열한 논의를 할 수 있는데, 본질 가치인 ‘맛’과 ‘영양’이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여기는 UI에 관한 것이므로 과일들을 UI 측면에서 살펴 보는 것도 재미있을 수 있겠다. 사람에게 쉽게 먹힐 수 있는 UI 를 갖고 있는 과일은 무엇인가?

이 때 주의해야 할 것은, UI 를 UI 자체로 보지말고, 좀 더 넓은 Context, 혹은 사회적 환경에서 봐야 한다는 점이다.

원시 시대를 상상해 보면 아무래도 사과 같은 과일이 가장 좋은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벗길 필요도 없고, 씻을 필요도 없이 나무에서 따서 바로 한 입 베어 물면 입안 가득 퍼지는 사과향… 아마 성서에도 그런 이유로 사과가 등장한 것이 아닐까?

아예 껍질이 존재하지 않는 딸기도 마찬가지이나, 메추리알과 딸기 같은 정도 크기의 먹거리들은 항상 먹기 위한 수고에 비해 한 번에 먹을 수 있는 양이 너무 적기 때문에 효율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사과하나를 따는 노력이나 딸기 하나를 따는 노력이나 비슷한데, 사과는 따고 나면 간단한 간식 정도는 되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딸기는 운반 도중 망가지는 경우도 흔하다. 껍질이 없기 때문이다.

얇은 껍질의 감도 마찬가지. 특히 홍시 같은 경우나 참외 같이 껍질 안의 것이 줄줄 흘러 내리는 경우… 도구 없이 먹다간 품위를 잃는다.

그러나 오늘날 각종 공해와 농약의 우려가 넘치는 시대 환경에서 껍질째 혹은 껍질 없이 먹는다는 것은 별로 매력적이지 못 하다. 따라서 어느 정도 두꺼운 껍질이 존재해야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수박이나 메론 같은 경우 껍질이 너무 튼튼하다 보니 매우 강력한 ‘힘’이나 ‘칼’ 같은 도구가 없이는 먹기가 힘들다. 튼튼한 껍질은 운반에서 용이하지만 반대로 먹기 불편한 결과를 낳는 것이다. 더군다나 수박은 한 덩이의 크기가 너무 커서 핵가족화한 현대 사회에서는 한 가족 조차도 한 번에 한 덩이를 소화하기 힘들다.

벗기기 쉬운 껍질을 가진 것으로는 바나나가 있다. 바나나는 노란색으로 길죽한 모양을 가지고 있어 작은 입을 가진 사람도 적당량씩 먹을 수 있게 편리하게 설계 되어 있다. 또한 껍질의 색이 파란색 -> 노란 색 -> 검은 점 무늬 등으로 익은 상태에 따라 변하는 인디케이터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특허 출원 감이다. (하이트 맥주 캔에 가장 맛있는 온도를 표시하는 부분도 특허다) 한 쪽은 뭉툭하지만, 다른 한 쪽은 ‘꼬다리’가 있어서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된다. 꼬다리 부분부터 껍질을 벗기는 사람은 이 꼬다리를 Opener로 활용하는 사람이고, 반대쪽부터 껍질을 벗기는 사람은 이 꼬다리를 손잡이(Handle)로 활용하는 경우이다. 물론 Opener로 쓰고 나면 나중에 끝부분을 쥐기가 좀 불편하고, Handle로 활용할라 치면 처음 껍질을 까기 시작할 때 다소 불편하다. 유학시절 지도 교수 포함 학생들과 이 문제로 우연히 잡담하던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 Opener로 사용하고 있어서 Handle로 사용하는 나로서는 좀 놀란 적이 있다. 당신이 조물주였다면 이 꼬다리는 Opener로 설계했을 것 같은가? 아니면 Handle로 설계했을 것 같은가?

오렌지는 바깥 포장 안에 개별 포장이 되어 있어 먹다가 잠시 중단할 수도 있다. 전체를 까지 않고 반만 깐 다음 반을 먹기도 좋다. (물론 맨 겉쪽은 약간 마르긴 하지만) 가장 좋은 경우는 두 사람이 나누어 먹을 때, 개별 포장이 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의 도구 없이 쉽게 즐길 수 있다. 바나나의 경우 혼자서 조금씩 나눠 먹기는 좋아도 둘이 나눠 먹기는 불편하다. 바나나 하나를 나눠 먹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껍질을 까지 않은채 뭉개어 나눠야 하는 불편함을…

그런데 오렌지의 껍질은 손으로 쉽게 까기에는 약간 두꺼운 감이 있다. 그래서 내가 뽑은 최고의 과일은 귤. 물론 맛을 제외하고 인터페이스 측면에서다. 일단 상품을 보호하는 껍질 – 까기 쉽고, 조금만 익숙해 지면 상품 내부의 상태 (익었는지, 상했는지)를 그럭저럭 알 수 있고, 또한 내부에 개별 포장 되어 있어서 시간을 두고 나눠 먹기나, 동료와 나눠 먹기 편하다. 물론 과대 포장이라는 비난이 있을 수 있으나, 먹을 수 있는 포장이라는 면에서 용서가 된다. 속포장재가 약간 맛을 떨어뜨리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개선해야 한다면 속포장재에 달라 붙는 겉포장재의 잔재 – 흰 줄무늬를 좀 없도록 하면 좋겠다. 물론 심심할 떄 그것을 뜯어내 가며 먹는 재미는 있지만서도.

 

당신이 생각하는 ‘먹기 쉬운’ 과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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