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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야 반말

2013. 12. 26. 02:10 | Posted by 이 재용

50-60대 아저씨가 대뜸 젊은 여종업원에게 '언니야, 물수건 좀 가져온나'라고 말하면 내 동석자이든 옆테이블 낯선이든, 듣는 내가 기분이 나쁘다. 아무리 종업원이라도, 또 나이 차이가 확연히 나더라도, 반말을 쓰는 것도 안 좋은데, 거기다가 저 이상한 호칭까지 변태스럽다. 그러나 한 번도 입밖으로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대일때, 나는 내가 서른, 마흔이 되더라도, 어린 아이들을 만나면 절대 처음부터 반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존대말과 반말의 구분은 나이차이가 아니라 상대방의 허락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때는 '권위'라면 몸서리치게 싫었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그 때 신념으로 삼은 것 중에 절대 직장 동료에게 반말하지 않기, 아내에게 반말하지 않기가 포함된다. 

직장 동료에게 / 아내에게 반말하지 않기는 지금까지 그럭저럭 지키고 있지만(물론 간혹 반말이 섞이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반말하지 않기는 전혀 지키지 못 하고 있다. 큰아들/작은아들의 친구를 만나면 처음부터 반말을 한다. 아주 초기에 한 두번 존대말을 해 봤는데, 말하는 나도, 듣는 아이도 너무 이상하고... 좀 변태스럽다. 20대 때에 간혹 아이들에게 존대말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40대에는 정말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포기했다. 포기와 동시에, 더 이상 50-60대 아저씨들의 '언니야' 반말도 비난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 나이가 되면, 지금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나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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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산타를 믿느냐?

2013. 12. 26. 01:55 | Posted by 이 재용

아빠는 산타를 믿느냐?

샤워를 하다가 큰아들이 물었다.(큰아들은 자기가 샤워할 때 내가 옆에 있어 대화 상대가 되어 주는 걸 매우 좋아한다) 아주 짧은 갈등 끝에, 나는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에 선물이 와 있는 걸 어떻게 설명하느냐?고 다시 묻길래 또 잠깐 갈등 끝에,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다고 얼버무렸다. 그랬더니 아들은 나에게 예를 들어보라고 했다.

예를 들어 할머니는 가족이 다같이 식사하기 전에 기도하시면서 '이 모든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느냐? 아빠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지만, 부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 앞에는 음식이 있고, 할머니가 그 음식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랬더니 녀석은 종교 이야길 물었다.

아빠는 제가 종교가 있으면 좋겠어요?

너도 알다시피 아빠는 종교가 없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너는 네 인생이니까 네가 알아서 판단하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아빠는 저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까 더 많이 알거 아니예요?' '흠... 세상엔 더 오래 살아도, 더 많이 배워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예를 들면 종교 같은거' 그 때쯤 아들은 샤워를 끝냈다.

예전엔 아이가 생기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모조리 얘기해 주리라 믿었다. 예를 들어 산타 같은 환상을 갖게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종류의 사고 방식을 처음부터 갖지 않도록. 그런데 요즘은 되도록이면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놔두려고 한다. 스스로 알 수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그러다보면 문제는, 때로는 내 신념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니, 애매하게 얼버무리거나 괴변을 늘어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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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와 레고 기차

2013. 12. 26. 01:52 | Posted by 이 재용


이제 사흘만 기다리면 큰 아들과 내가 1년중 가장 기다리는 12월 25일이 된다. 큰 아들은 자기가 받고 싶던 선물을 받기 때문에 기다리고, 나는 해가 다시 길어지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 보통의 경우였으나, 올해는 특별히 더 기다려진다.

지난 3년간 30만원 가까이 하는 레고 기차를 갖고 싶었지만, 매년 가을 무렵부터 큰 아들에게 암시를 넣어도, 녀석은 매년 크리스마스에 레고 기차가 아니라 다른 것을 원했다. 마트에 가서 내가 그 앞을 서성거리다가 레고 스타워즈나 레고 히어로 팩토리를 질리도록 살펴보고 난 큰 아들이 다가 오면 손으로 저 높은 선반 구석에 먼지 맞고 있는 레고 기차를 가리키면서, 저게 있으면 얼마나 집에서 재미있게 놀 수 있는가를 설명했건만, 녀석은 그 순간만 같이 키득거리지, 집에 돌아와 제 엄마가 올해 산타에게 뭘 받고 싶은지 알아내는 정례 유도 심문에는 매번 엉뚱한 것을 대답하곤 했다. 

이제 나이가 들은 건지, 아니면 지난 3년간의 암시가 통했는지 올해 마침내 큰아들이 산타로부터 '레고 기차'를 받고 싶다고 제 입으로 순순히 말하였고, 레고 기차는 현재 온라인 구입 절차를 거쳐 집안 모처에 숨겨져 있다.

그간의 관례를 보면, 일단 시리즈의 하나를 집에 들여 놓으면, 녀석은 순순히 다음 것을 찾게 되어 있기 때문에, 필요한 레일이라든지, 추가 기차(이번에 사는 건 화물 기차라 여객 기차가 필요) 등은 자연히 2014년 1년에 걸쳐 갖추어질 것이고, 여기에 둘째 녀석이 조금만 호응을 해 준다면(기차가 돌아가는 순간에 팔짝팔짝 뛴다든지 하는 반응) 의외로 좀 더 급속히 진행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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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펌 메시지와 소프트웨어 자신감

2013. 11. 24. 14:15 | Posted by 이 재용


[펌] 컨펌 메시지와 소프트웨어 자신감  다이어리 

2004/03/07 09:28  수정  삭제

복사http://blog.naver.com/arangyi/100001177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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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페 > user experience | arangyi
원문 http://cafe.naver.com/ux/328

얼마전 HCI연구회 게시판에 올렸던 글인데, 여기 분들도 관심 있으실 것 같아서 약간 수정하여 올려 봅니다.

 

컨펌 메시지와 소프트웨어의 자신감

> 아웃룩으로 메일 보낼 때
> 메일을 보내시겠습니까? 를 왜 안물어보고
> 확~ 보내는지 아는 분 있나요?
>

일단 제 간단한 생각은... 물어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흠... 다시 질문을 바꾸어 보면... 왜 물어봐야 하죠?

일반적으로 Confirm 메시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규칙은, 되돌릴 수 있는 것이면 묻지 마라는 거죠. 예를 들어 파일 삭제의 경우, 휴지통에 들어가서 다시 살릴 수 있는 상황이면 '정말 지우겠냐'라고 묻지 말고, 파일 삭제후 복구가 안되는 상황이라면, '정말 지우겠냐'라고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모든 UI Design의 원칙들이 그러하듯이 여기에는 '원칙'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수많은 크고 작은 예외들이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키보드 시퀀스상 실수로 쉽게 삭제키가 눌려질 수 있는 상황이라든지, 달리 변경할 수 없는 애매한 아이콘이나 버튼 레이블 때문에 호기심에 찬 사용자가 자주 눌러 볼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삭제 버튼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든지 하는 경우라면 되돌리기 가능해도 컨펌 메시지를 넣는 것이 좋겠죠.

윈도즈 시스템에서 드래그 앤 드롭으로 휴지통에 떨어뜨리면 묻지 않지만, 파일 선택 후, Delete키를 눌러서 삭제할 경우에는 컨펌을 받습니다. 아마도 삭제키는 실수로 눌려지기 쉽지만, 실수로 휴지통에 떨어뜨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물론 저도 실수로 휴지통에 떨어뜨린 경험이 있지만 그건 너무 예외적인 경우겠죠)

반대로 지워질 대상 자체가 썩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고 작업의 효율성이나 속도가 중요한 경우, 이미 해당 작업 자체에 안전장치가 있는 경우 (예를 들면 동시에 눌릴 수 없는 복잡한 키 조합을 할당한 경우) 라면 지워진 후 되돌릴 수 없다 하더라도, 컨펌 메시지를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죠.

특히 사용자 작업 순서상, 되돌리기를 원하는 시점이 작업 시점과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경우, 그 시점에서 '컨펌'은 진정한 의미가 없으니까, 즉 물어도 소용 없으니까 빼는게 좋겠죠. 예를 들어 '편지 보내기'를 되돌리고 싶은 경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실수'로 보내기 버튼을 누른 경우랑, 다른 하나는 '내용 번복'으로 보낸 편지를 회수 하고 싶은 경우죠. 이 때 전자는 번복 시점이 바로 인접해 있으니까 컨펌 메시지가 의미가 있지만, 후자(내용 번복으로 인한 보내기 취소)는 번복 시점이 대개는 보내기 시점과 떨어져 있으니까 (편지 보내놓고 한참 뒤에 후회하거나, 내용상 실수를 발견하죠) 컨펌 메시지가 아무런 의미가 없죠. 이 때 UI Designer가 고려해야 할 것은 전자/후자의 발생 확률과 그에 따른 치명도인데, 제 생각에 전자의 경우 확률도 낮고, 위험도도 높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제 인생에서 두 세 번 정도 편지를 완성하지 않고 실수로 보내기 버튼을 누른 경험이 있지만, 그게 그렇게 위험했던 적은 없었다고 봅니다. (물론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또한 모든 UI Design 원칙들이 그러하듯이, 이러한 원칙과 복잡한 예외에도 불구하고 규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도... 최영완씨가 이 부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흔히 쓰기 쉬운 UI ...에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바보를 위한 UI를 설계하려고 한다는 겁니다. 누구나 쓰기 쉬운 UI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 결국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를 위한 UI를 만들어 버리는 거죠. 물론 그 바보가 쉽게 쓸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쉽게 쓸 수 있겠죠. 그러나 그러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 바보로 느껴지는 기분을 피할 수가 없게 되고, 점점 그 소프트웨어가 싫어지게 됩니다. 논리적으로 보면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지만, 많은 초보 UI Designer들이 실제로 이런 실수를 하고, 때로는 Microsoft 같은 큰 회사의 전문가들도 이런 실수를 하게 됩니다. 이전 버전 Office의 Paper Clip처럼 말이죠.

이것은 흔히 HCI의 4대 요소 가운데 하나인 Level of Support를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최근 다시금 유행하는 다양한 사용자 프로파일링 기법으로 피할 수 있는 문제만도 아닙니다. 사용자의 전문성이나 외부적인 도움과는 어느 정도 별도로 분명히 주의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소프트웨어는 자신감이 있어야 하고, 또한 쓰는 사람에게 자신감을 불어 주어야 합니다. UI 는 그렇게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쓰는 사람을 바보로 취급하고 바보로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장과 비서와의 대화를 들어 보시죠.

 

어느날 오전

사장 : 이 편지를 보내 주게.
비서 : 그러니까 이 편지를 보내란 말씀입니까?
사장 : 그래. 보내라니깐. (뭐야... 한국말을 모르나?)

 

잠시 후

사장 : 이 편지도 보내 주게.
비서 : 그러니까 이 편지를 보내란 말씀이죠?
사장 : 그래. 보내라구. (뭐야... 무슨 불만있나? )

 

그 날 오후

사장 : 이 편지 좀 보내 주게.
비서 : 그러니까 이 편지를 보내란 말씀인가요?
사장 : 그래. 보내란 말이야. 그리고 앞으로 내가 편지 보내라고 말할 땐, 편지를 보내라는 뜻이야. 그러니까 그냥 보내. 보낼 거냐고 다시 묻지 말고. 알았어?

 

이와 같은 서비스를 사람인 '비서'가 제공한다면 정말 한심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편지 보내기 버튼도... 내가 보내라면 그냥 보내야지, 내가 '정말' 보내기 원하는지 물어본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거기서 발생할 수 있는 실수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지, 한 번 더 물어본다는(Confirm) 방식으로 해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소프트웨어 자신을 바보로 만들 뿐만 아니라, 쓰는 사람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 밤...

사장 : (곤란한 표정으로) 어... 아침에 보내라고 했던 편지 말이야... 보냈어?
비서 : 보냈죠. 그래서 제가 꼭 되물었잔아요.
사장 : 허... 그 때야 당연히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거 보내지 말았어야 하는데...

 

사람들에게도 이러한 일이 생기는데, 이런 문제가, 비서가 매번 'Confirm'을 받는다고 해결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물론 소프트웨어가 어떤 작업에 있어서 얼마나 자신감을 가져야 하느냐는 것은, 또한 모든 UI 원칙이 그렇듯이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해당 작업의 구체적 상황에 따라 Confirm 메시지를 보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가 결정되겠죠. 이메일을 보내는 매카니즘과 상황이 일반적인 사용자들에게는 꽤나 안정적이고 일반적인 작업이 되어 가면 갈 수록, 구체적 진행 상황 보고(예를 들면 송신 서버와의 교신 상태 등 - N씨의 UI 원칙에 보면 항상 시스템의 상태를 표시하라는 황당한 규칙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과, 각 소 단계에서의 Confirm들은 점점 표시할 필요 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더욱 더 일반적인 작업이 되면, 이제 최종적으로 보낼 건가, 말건가의 Confirm 조차도 필요없는 일이 되겠죠. 편지 보내기는 이 단계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작업 자체가 시간이 많이 걸린다든지, 기타 리소스를 많이 먹는 '중대' 사안이어서 소프트웨어가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해야할지 어려울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편지를 보내려면 전화 통화중이더라도 그것을 끊고 모뎀 접속을 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현재 컴퓨터가 상당히 느린데 거기다가 편지 보내기 작업까지 하면 중대 작업에 방해가 될 확률이 있다든지 하면 소프트웨어가 스스로 판단하기 어렵겠죠. 그러나 오늘날 편지 보내기 작업은, 특정 작업(서버로의 송신)을 분리시키든, 아니면 최소한 컴퓨터 처리 능력이 다른 거 하면서 편지 보내기 기능은 할 정도가 된다고 판단했든간에 어떤 경우라도 이 정도는 사용자의 Confirm 없이 진행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앞의 경우가 소프트웨어와 사용자가 동시에 바보가 되는 경우라면, 소프트웨어 자신은 빛나면서 사용자를 바보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원치도 않는데 이러쿵 저러쿵 옆에서 잔소리를 하는데, 그 잔소리가 틀린 거 반, 맞는 거 반이라면 정말 짜증나는 일입니다. 제 친구는 오피스 클립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르더군요. "I am a native speaker of English. I know English grammer!" 이렇게 소프트웨어 자신은 자신감에 차서 헛소리를 하더라도, 사용자의 자존심을 긁어서는 안되는 거죠. 설령 그것이 맞는 지적이더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흔히 도움말이 없는 것 보다는 있는 것이 무조건 훨씬 낫다고 생각하는 소위 '전문가N'들도 많은데, 제 생각은 적절하지 않은 도움말은 Screen real estate를 점유하든, user cognitive load를 점유하든, 무언가 차지함으로서 마이너스 요소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사용자를 '바보'로 만들고 자부심과 자신감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로 제품에 대한 '충성도' 하락으로 연결되겠죠.

물론 이런 거만한 태도의 소프트웨어 뿐만 아니라 겸손하면서 쉽게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도 사용자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죠. 어떤 직종의 경우는 다른 전문가들 틈에서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이 작업하는 화면이 상당히 어렵게 보이는 것을 사람들이 은근히 즐기고 있었는데, 어느 사용성 전문가라는 사람이 나타나 그 화면을 쉽게 만들어 버리자, 자기 자신에 대한 self-esteem도 낮아져 버리고, 주위 사람들의 시선 또한 곱지 않을 것을 예상했는지, 거부해 버리는 경우가 생긴 사례를 본 적이 있는데, 이 경우 소프트웨어를 너무 쉽게 만들어 버림으로서 문제가 된 상황일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S/W UI 뿐만 아니라, 작업 관행에 대한 개선까지 동시에 이루어져, 이 직군의 사람들에게 좀 더 고급의 임무를 부과하는 정치적 고려가 필요하겠죠.

이제 이 글의 결론을 내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제가 이렇게 썼는데...

"일단 제 간단한 생각은... 물어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흠... 다시 질문을 바꾸어 보면... 왜 물어봐야 하죠?"

다른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이 문제는... 상식적으로 없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상이 제 생각입니다...

------------

HCI 게시판에 글을 처음 올리다 보니... 좀 떨리는군요... 다들 아시는 내용으로 중언부언한 건 아닌지... 엉뚱한 방향으로 아는체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혹시 제 글에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다면... 언제라도 답글 달아 주세요... 고맙습니다.

 

이 재 용

(주)피엑스디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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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과 사용성 옹호자

2013. 11. 24. 14:15 | Posted by 이 재용
혁신과 사용성 옹호자  다이어리 

2004/03/06 12:56  수정  삭제

복사http://blog.naver.com/arangyi/100001165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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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인터랙션지(2004 JAN+FEB)에 재미있는 기사가 많았는데, 그 중 innovation에 관한 두 기사("To Innovate or Not to Innovate"와 "Digging in the Wroing Spot")가 특히 그랬다.

 

User-centered Design (UCD)를 하는 사람들이 흔히 조심해야 하는 것으로 바퀴 다시 발명하기(reinvening the wheel)가 있는데, 이는 새로운 것을 찾다 보면, 이미 남들이 다 고려했던 것을 다시 생각하구선 좋아하는 결과가 되는 것을 경계함이다. 웬만하면 현재 것을 쓰는 것이 안전한 UCD의 세계에서 혁신이란 무엇일까?

 

첫 글에서 저자는 2003년도 미국 기업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혁신에 대한 조사를 인용하였는데, 23%가 혁신을 'a solution that identifies and addresses the unmet needs of consumers'이라 하였으며, 이것을 'discovery'나 'revolution'과 연관시킨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또한 조사 대상자 절반 이상의 임원들이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innovation과 관련된 예산을 증액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다양한 기법으로서 관찰, 프로파일링, 평가 등을 글에서 열거하였다.

 

두 번째 글의 저자는 잘못된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를 쓰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하면서, "redefine the problem"이 중요하다고 한다. 저자가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나는 읽으면서 바로 이것이 혁신의 핵심이라고 느꼈다. 내가 지난 10년간 이 분야의 일을 하면서 해냈던 많은 '혁신'의 핵심은 알려진 문제의 'solution'을 찾은 것이라고 보다는 위의 글대로 알려지지 않은 문제의 solution, 혹은 다른 말로 하면 'redefine the problem'을 함으로써 얻은 것들이다.

 

두 가지 글을 읽으면서 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혁신과 사용성에 관한 내 오랜 불만이었다.

 

논리적으로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Usability, Standard, Guideline 옹호자들은 대개 innovation의 적이다. 그것은 사람의 사고 과정이 한정되어 있음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겨진다.

 

흔히 이 분야의 초심자들이 쉽게 저지르는 오류가, 사용자 중심- 하면 '사용성 평가'부터 떠올린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쉽게 이해하고 중요한 개념이다 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담박에 결과가 들어나야 좋아하는 업계의 풍토와, 정량적 데이터가 들어나야 '연구 결과'가 되는 학계의 풍토가 동시에 빚어낸 것이리라 생각한다. 나도 처음 시작할 때, '사용성 평가'가 전부 다 인 줄 알았고, 또 '사용성 테스트룸(One-way Mirror Room)'이 전부 다 인줄 알았더랬다. 다행인 것은 나만 그러는게 아니라, 그 뒤에 다른 사람들 (한국/미국 모두) 보니, 다들 처음 시작할 때는, 사용성 사용성 하면서 일단 테스트 룸 부터 갖추고 이를 업적으로 자랑하는 여러 회사를 볼 수 있었다. 또한 아무리 설득해도 끊임없이 정량적 자료를 요구하는 고객도 여럿 있었더랬다.

 

그러나 정작 '평가'라는 것은 무언가 '기준'이 서지 않고는 안되는 일이고, 이 '기준'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의미없는 것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또한 속성상, 창조의 고통을 이해하기 보다는 비현실적 이상에 기초하여 깍아내리기 좋아하는 문단의 평론가들처럼 공허한 입방아만 늘어놓기 십상이다. 이런 편향된 방법이 고객을 실망시키고... UI ? 해 보니 별거 안 나오데? 라는 선입관을 갖는 고객만 늘어나게 될 수 있다. UI 원칙들이라는게 양면적이고 상호 모순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는 관계로 이를 근거로 평가하면 이어령비어령 식의 결과가 나오든지 하나마나한 뻔한 이야기가 나오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제대로된 평가는 중요하고 의미가 있으나 전반적 시장의 상황은 긍정적 지향점보다는 부정적 결과에 더 주목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대해 나 자신도 실망하고, 이 분야를 때려치워야 겠다고 생각할 때 쯤 내 사고를 전환시킨 계기가 있었는데, 이 분야에 '사용성 평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창조'의 방법도 있더라는 것이다... 그 전에는 없던 것이 새로 나타난게 아니라, 뒤섞여 있던 것이 어느 날 부터 내 눈에 구분되어 보여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세상을 다시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해악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최근 읽은 다양한 영문 기사/책에서 이러한 분리를 시도하는 것을 보았다. 그 중 하나가 위의 첫번째 기사이고, 또 contextual design 책이 그 둘이고, ok-cancel의 만화들이 그 셋이다. 이들 모두 조심스럽게 User Interface에서 '평가' 혹은 '평가자'와 '창조' 혹은 '설계자'를 구분하려고 하고 있다.

 

다른 적용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전반적으로 산업 공학과 연관된 '사용자 평가'의 작업들은 모두 후행 평가다. 여기서 혁신적인 것이 나올 수도 있겠으나, 그 보다는 선행적인 '사용자 연구'에 의해 더 쉽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우리 회사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양한 연구 기법들 (각종 Inquiry or observation기법, 각종 user profiling or modeling 기법, 각종 prototyping 기법, 각종 논리*창조 기법 등등)이 '평가' 기반 보다는 확연히 구분되는 innovation 기법이다. (여기서 '후행'이란 말은 시간적으로 뒤에 벌어진다기 보단, 기준이 먼저 만들어진 뒤 실행하는 평가의 속성상 새롭게 문제를 정의하기 보단 이미 정의된 문제에 근거한다는 뜻이다.)

 

딱 부러지게 구분은 안되지만, 그래도 사용자 인터페이스 업계에, '평가' 기법과 '창조' 기법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여기에 추가하여 한 가지를 더 하자면 '생산' 기법이다. 최근 몇 년새에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pattern approach의 경우 또 하나의 '표준화'로 접근하게 되면 innovation의 적이 될 것이다. 이것은 UI의 '생산성 향상'으로 초점을 맞춰야 하고 다행히 그렇게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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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텍쥐페리  다이어리 

2004/03/06 12:09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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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vin Mullet, Darrell Sano가 쓴 Visual Interface Design (안그라픽스, 황지연 번역)에 보면앙트완 드 생텍쥐페리의 인용이 나온다. 

완벽함이란 더 이상 무엇인가를 더할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무엇인가를 뺄 것이 없을 때 이루어진다.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저자는 계속 되는 글에서 '품위(elegance)'란 디자인에 부여된 문제를 가장 경제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접근 방법을 통해 소비자가 보는 즉시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따. elegance의 어원역시, 뽑아내다 혹은 신중하게 선택하다라는 뜻의 라틴에 'eligere'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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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2013. 11. 22. 00:27 | Posted by 이 재용

보통은 꿈을 전혀 꾸지 않는다.

누우면 바로 잠들어 버리고, 깨우면 벌떡 일어나는 스타일이라 아마도 꿈을 꾸겠지만 기억하는 일이 거의 없다. 아주아주 드물게 일어나서 꿈이 기억나는 경우가 몇 번 정도는 있었지만 정말 드문 일이다.


그런데 얼마전 요로 결석 이후에 의식적으로 물을 많이 먹다보니, 밤에 자다가 (화장실 가기 위해) 간혹 깨는 경우도 생기고 무언가 자면서 꿈 비슷한 것을 꾸기도 한다. 잠에서 깨면 기억이 없긴 하지만 자면서 무언가 계속 상황에서 내가 움직이고 생각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피곤하기만 하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한 것 같아 좀 불만스러웠다.


그런데 오늘 꿈 속에서 너무 그리운 분을 봤다.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지 10년 조금 넘었는데,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줄지를 않는다.

특히 힘든 일이 있을 때나, 누군가에게 간절히 매달리고 싶을 때, 나는 언제나 아버지를 찾는데, 어떤 때는 정말 힘들어서 '꼭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꿈에서라도 좋으니까, 아버지 품에 안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가족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화장실에서 엉엉 울 때도 있었다. 


다른 식구들 꿈에는 간혹 나타나시기도 해서, 식구들이 모였을 때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전혀 꿈을 꾸지 않는 스타일의 잠을 자는 나로서는 부럽기만 했다. 그런 아버지를 오늘 만났다.


베이지색 잠바를 입은 채, 나를 향해 편안히 웃으시는데, 그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꿈 속에서 미처 가서 안아 보려는 생각을 못 한 것이 너무 후회되긴 하지만, 가까이서 나를 보시며 웃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너무 반갑고 좋아서 막 울었다. 꿈 속에서 울다가 잠이 깼는데, 일어나보니 실제로 내가 울고 있었던 것처럼 눈에 눈물이 가득차 넘쳐 흘렀다.


또 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지만, 너무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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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 소년 제이-맥, 농구로 말하다

2013. 11. 17. 23:53 | Posted by 이 재용


자폐 소년 제이-맥, 농구로 말하다

The Game of My Life

A True Story of Challenge, Triumph, and Growing Up Autistic

by Jason "J-Mac" McElwain with Danies Paisner


이 책은 심각한 자폐 판정을 받았던 주인공이 운동을 좋아하면서 점점 더 사회성과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에서 농구에 심취하게 되고, 농구 선수로 뛸 수는 없었지만 농구 매니저로 팀을 도우다가 마지막 순간에 직접 농구 선수로 뛰던 순간을 다룬 책이다.

이 일은 유투브와 ESPN, CNN 등을 통해 전국적인 화제로 퍼졌고, 책이 나오고, 또 영화를 만들었다. 


사실 원래의 이야기는 굉장히 감동적이었을 것 같긴 한데, 책 자체는 썩 그리 재미있지는 않았다. 상업적인 작가에 의해 좀 만들어진 느낌이랄까? 너무 짧은 준비로 분량을 늘려 만든 책 같은 느낌이다. 미국의 경우 이 사람의 이야기가 많은 자폐아/부모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한다. 결국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 하고, 수퍼마켓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좋아하는 일을 위해 노력하고, 그 일을 이루었으며, 그 주변의 사람들이 그를 정말 많이 도와주었다는 이야기가,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아니 남의 나라 이야기가 맞지.


예를 들면 주인공이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크로스컨트리 팀에 지원했고 엄마는 코치에게 내가 신발 끈을 묶지 못한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모든 경주나 연습을 하기전에, 내 신발 끈을 묶어 주는 수호 천사를 갖게 되었다. 수호 천사는 우리 팀에서 나의 신발 끈을 묶어 줄 수 있는 다른 아동이었고, 엄마는 그 아이를 그렇게 불렀다. 수호 천사는 운동부에서 팀원들이 붙여 준 이름이었다. 

우리 팀에서 나의 수호 천사는 단지 나의 신발 끈만 묶어 주는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많은 일을 도와주었다. 수호 천사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그들은 나의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때마다 수호 천사는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맡았다.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누가 있는지, 같은 상황에서 누가 함께 뛰고 있는지, 또는 연습에서 같은 훈련을 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졌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든, 그들은 나의 신발 끈을 묶어 주는 것을 즐거워했고 나에게 따라오라고 말해 주었으며, 아주 더운 날에는 물을 많이 마시라고 조언해 주었다. 친구와 함께 한다는 것은 서로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가끔씩 어떤 일에서는 나도 그들을 도울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하기 위해서 학교나 선생님 아니면 엄마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냥 하면 된다. 그것은 팀 스포츠의 훌륭한 점이다. 이는 팀원을 가지고 있으며 팀원들은 신발 끈을 묶는 하찮거나 작은 일이라도 서로 돕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p133-135

아마 한국에선, 다른 학부모들의 성화로 이런 일이 불가능할 것이다. 실은 그 아이들도 누군가를 도우므로서, 팀웍을 배우고, 기쁨을 느낄 수 있을텐데 말이다.


반대로 농구팀은 주인공이 정말 들어가고 싶었지만, 매번 테스트에서 떨어졌다. 그래도 그는 꾸준히 연습해서 매년 다시 도전했고, 선수는 될 수 없었지만 매니저로서 늘 선수들이 자유투 연습하는 것을 돕고, 수건이나 물을 갖다 주거나, 상대 팀 선수들의 기록을 모조리 외워 코치/감독을 도왔다. 그는 이런 일이 하찮은 일이라거나 실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고 꾸준히 해 왔고, 마침내 팀이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출전할 기회를 가졌다.


남들이 다 집에간 뒤에도 하루에 천개씩 슈팅 연습을 했던 그는 동료들이 집중적으로 그에게 슈팅 기회를 준 덕분에 4분여 동안 계속되는 3점슛을 성공시켜 20점을 득점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팀은 지역 본선 우승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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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아 가정의 좌충우돌 성장 이야기

2013. 11. 15. 01:40 | Posted by 이 재용


자폐아 가정의 좌충우돌 성장 이야기

수잔 세니터 저


Making Peace with Autism

One Family's Story of Struggle, Discovery.

By Susan Senator


이 책은 열 다섯살짜리 자폐 아들을 둔 엄마의 가족 이야기다. 처음 큰 아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던 때부터, 첫째가 자폐 판정을 받기까지, 그리고 둘째를 낳고, 또 세째를 낳아 길러 열 다섯살이 될 때까지 겪었던 많은 일들과 교훈을 적고 있다.


'냇'은 처음부터 눈맞춤이 없었다고 한다. 아기였을 때부터 반응과 놀이가 다른 아이들과 달랐고, 언어 습득도 많이 지연되었다. 대답보다는 반향어가 많았다. 그리고 세 살 때 처음 자폐 판정을 받았다.


자폐아들은 낯선 사람, 낯선 환경, 그리고 낯선 행동들을 싫어한다. 책에서 배운 행동들을 규칙화한다든지, 반복적으로 해야할 일을 보드로 만들어서 설명하면 쉽게 이해하는데, '냇'의 부모들도 그가 책에서 한 번 배운 일은 쉽게 적응하는 것을 보고, 새로운 행동을 그에게 시키려고 하는데 만약 적절한 책이 없는 경우에 항상 직접 스스스로 책을 만들어서 가르쳤다고 한다.


치과나 병원을 미리 가보는 책으로는 코듀로이 병원에 가다 Corduroy Goes to the Doctor, 베런슈타인 곰이 치과에 가다 The Berenstain Visit the Dentist, 바니 치과에 가다 Barney Goes to the Dentist 등이 좋다.


미국은 특수아동의 경우 개별화된 교육계획을 위한 팀을 구성해 준다고 한다.


이 책에는 저자가 큰 아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찾아 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이야기, 먹이고 싶지 않았던 약물 치료를 결심하게 된 계기, 폭력 성향으로 인해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 나오던 날, 정상적인 둘째와 셋째가 어떻게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그리고 부부의 삶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등을 상세하게 적고 있다.


이들 부부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행복했는지 공감하며 읽다보면 읽는 내내 눈물을 짓게 된다.

나는 교사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학급에서 냇을 데리고 나왔다. "가자, 얘야. 이곳을 떠나자꾸나." 나는 냇이 좋아하는 영화 가운데 하나인 '덤보(Dumbo)'에서 아들 덤보를 왕따시키는 아이들로무터 덤보를 데리고 나오는 코끼리 엄마인 덤보 부인처럼 느꼈다. 나는 독선적인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덤보 부인과 덤보처럼, 냇과 나는 갈 곳이 없었다.p280

아이가 성장하면서 간혹 폭력적이 될 때, 엄마로서 통제가 어렵고, 또 동생들이 다치게 될까봐도 두렵고, 이러다가 결국 성인이 되어서 수용 시설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닌지도 두렵게 된다. 


또 부적절한 곳에서 자위 행위를 한다든지, 흥분한다든지 하는 일도 생기게 된다. 둘째는 이런 환경에서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버리고, 셋째는 자신과 비슷하게 만화영화를 좋아하는 첫째 형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이렇게 모든 것이 어려운 가정에서도 저자는 가족들의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울며 웃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이제 그 힘들었던 경험들을 우리에게 공유하고 있다.



자폐증 연구 단체 National Alliance for Autism Research www.naar.org

미국 자폐 사회 웹사이트 www.autism-society.org

자폐를 다루는 다른 가족들의 인생에 대해 들여다보고 도움 받기를 원하면 www.genrecooksho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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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게 경고한다

2013. 11. 13. 23:57 | Posted by 이 재용
내 몸에게 경고한다. 영양분 남는다고 자꾸 배나 뒷목에 저장 좀 하지 말란 말이다. 삼겹살이나 돼지 목살 만들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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